[서평] 둔색환시행
일본 문학의 거장이라는 온다 리쿠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이다. 집필 기간도 15년이나 걸렸고 651페이지 분량의 꽤 두꺼운 장편소설이다. 이야기의 주요 테마는 <밤이 끝나는 곳>이라는 소설로부터 이어진다. <밤이 끝나는 곳>을 영화나 드라마로 촬영하는 과정에서 배우, 스태프, 시나리오 작가가 사망해 세 번이나 중단해야 했던 저주받은 소설이다. <둔색환시행>을 읽으면서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을 알아보다 알게 되었는데 <밤이 끝나는 곳>은 작가 자신이 쓴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둔색환시행>과 함께 읽어야 할 만큼 세계관이 서로 이어진다. 작가 자신이 밝힌 것처럼 한 작품 안에 독립적인 다른 작품이 연관된 메타 픽션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둔색환시행>과 <밤이 끝나는 곳>을 동시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둔색환시행> 연재를 일시 중단한 뒤 <밤이 끝나는 곳>을 완성시킨 뒤에야 연재를 재개했다는 것이다.
마치 <둔색환시행>을 읽으면 실제 작품인 <밤이 끝나는 곳>을 읽어야만 할 것처럼 시종일관 <둔색환시행>에 등장인물인 소설가 후키야 고즈에, 마사하루, 영화감독인 쓰노가에, 영화 프로듀서인 신도, 편집자 시마자키, 만화가인 마나베 자매는 <밤이 끝나는 곳>에 얽힌 사건과 에피소드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둔색환시행> 작품 안에 <밤이 끝나는 곳> 제1장과 제2장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하는데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서로 공유한다고 하니 색다르면서 재미있는 시도인 것 같다. 자신이 쓴 작품을 다른 소설에서 제3자의 입장이 되어 등장인물이 돌아가며 이 저주받은 소설에 얽힌 수수께끼와 서로 다른 해석이 내놓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이 모여 크루즈 여행을 함께 하는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치열하고 진지하게 <밤이 끝나는 곳>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온다 리쿠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지만 써 내려가는 문체가 유려하고 꽤 탄탄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섬세한 감정 표현과 인위적이지 않게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긴 호흡이 필요한 작품인데도 시종일관 <밤이 끝나는 곳>과 연계하여 궁금증을 자아내서 흡입력을 가졌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설정일 수 있지만 이야기가 겉돌지 않게 치밀한 구성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등장인물마다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다 보니 읽을수록 캐릭터성은 풍부해지고 소설 속에 빠져들어 읽었던 것 같다. 이런 느낌은 미우라 아야코의 대표작 <빙점>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벌써 <밤이 끝나는 곳>을 영상화할 때마다 여러 명이 죽어나갔는데 소설가, 영화감독, 프로듀서, 편집자, 만화가가 한 공간에 모여 만화화와 연극화를 하기로 했다는데 <밤이 끝나는 곳>이라는 소설과 관계된 비밀을 알아가는 재미가 또 남다르게 다가온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