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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Since 2013 ~)

[서평] 말벌




역시 기시 유스케라는 말이 나오는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인 <검은 집>을 감명깊게 읽은 뒤 처음으로 만나는 신작 <말벌>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그의 작가적 역량이 반하게 되며 말벌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그 안에 인간이 가진 탐욕과 어두운 면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이한 것은 미스터리 소설임에도 1인칭 시점에서 쓰여졌다는 점이다. 즉, 야쓰가타케 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련의 일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다. 조용한 산장에 갑자기 노랑말벌이 한 마리가 날아드는 것을 기점으로 <말벌 매뉴얼>이라는 책자에 의지한 채 퇴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안자이 도모야. 그는 미스터리 소설가이자 <산장의 여인>을 출간한 후 베스트셀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아내 유메코는 동화책 작가이면서 미모도 뛰어나다. 근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벌을 계기로 안자이는 유메코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게 된다. 산장에 계획적으로 말벌을 풀어 소리없이 죽도록 꾸몄다고 여긴다. 심지어 생명 보험도 자신이 죽으면 아내에게 지급된다는 걸 알고 심증을 굳힌다. 


말벌을 퇴치하는 와중에도 작가가 얼마나 말벌에 관해서 연구를 많이 했는지 퇴치요령부터 응급시 처방할 치료약품까지 세세하게 적어놨다. 처음에는 천을 덮어서 죽이지만 나중에는 뜨거운 물을 뿌리거나 바리산, 말벌 블라스트 스프레이를 이용하는 등 전문적인 방법이 총동원된다. 말벌 하나로도 섬뜩한 공포를 느낄 수 있겠구나 하던 시점에서 갑자기 과거 속 건설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일을 영리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늘 상사들로부터 훈계를 받는 사원으로 등장한다. 심한 질책과 비난을 받아도 단지 인생을 지나는 하나의 점이라 여기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날 늦게 까지 남은 그는 잠그지 않은 서랍의 모든 서류를 분쇄기에 넣어버린다. 자신의 상사였던 과장의 의자에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해버린다. 현실 부적응자에 과대망상까지 있는 그는 소설가가 될거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직업을 전전하며 결코 나아지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발견한 책에서 안자이 도모야라는 소설가를 알게 된 뒤로 그의 책은 모조리 읽게 되는데 그는 자신을 대신해 살아가는 분신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하찮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도 자신이 되려고 했던 모든 걸 이룬 안자이 도모야를 자신인 것처럼 인식하고 그의 것을 다 빼앗아 버리려고 한다.


초반에는 정말 안자이가 사건의 피해자이며 유메코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모든 상황을 벗어나려는 데 초점을 맞춰져 있다면 중후반에는 이 모든 일들을 반전시키는 진실이 밝혀져나간다. 여기서 잠시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는데 실제로는 유메코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고 미사와와 스기야마는 유메코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과대망상이 불러온 비극으로 그릇된 현실인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한 남자가 벌인 참극이었다. 순간의 기지로 탈출에 성공한 유메코와 말벌 전문가인 미사와의 도움. 노랑말벌과 장수말벌은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지만 실제 더 무서운 존재는 바로 인간이었던 것이다. 다 읽고나서 역시 기시 유스케라는 말이 나올 법한 책으로 문고판으로 나와 중편소설같은 느낌이지만 인간의 내면에 들어찬 본심을 절묘하게 끄집어내어 극적인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눈 덮인 어느 고요한 산장에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는 말벌보다도 더 지독한 악마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