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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Since 2013 ~)

[서평] 한복 입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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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추리소설이나 역사소설보다 확실히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재미로 충만한 소설이다. 현실과 과거를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런 설정이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들어주었다. 하나의 퍼즐조각을 맞춰나가듯 소설은 빠르게 전개된다. 방송국 PD인 진석은 우연히 어린이 과학관에 전시된 비차를 보면서 장영실이 무악산에서 실험했던 비차의 모형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그림이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다큐멘터리로 기획하고 있는 <한복 입은 남자>의 정보를 얻기 위해 신 작가와 들렀는데 그곳에서 엘레나라는 여성을 알게 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진석이 기획하는 것과 엘레나가 알고 싶어하는 것 사이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온 엘레나는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라며 그에게 조상의 유품으로 전해내려오는 비망록을 몰래 맡긴다. 그 비망록에는 3개 국어의 글자와 그림이 복잡하게 담겨있는데 고고학에 일가견이 있는 자신의 친구이자 지하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강배를 찾아가 해석을 의뢰하는데 이 시점부터 과거와 현실을 오가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신분제와 사대주의가 뿌리깊게 내려앉은 조선시대에서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을 내려야할까? 비록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우수한 과학기술을 갖고 있던 그는 갖은 핍밥을 당했지만 새로 부임한 사또가 그를 알아보고 농민들의 가뭄을 해갈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실을 지원한다. 밤새면서 일에 매달리던 그는 무자위라는 장치를 고안하게 되는데 물의 흐르는 속성과 높낮이를 고려하였고 유속을 활용하는 방법 외에도 장정 둘이 수동으로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등 그 당시에 이런 기법들을 어떻게 발명할 수 있는지 읽으면서 매우 신기했다. 순전히 눈으로 보고 들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해내서 만들었을텐데 천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행히 영실에게 하늘의 길이 열렸는지 그의 기술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는데 사또 이자청의 추천으로 만복과 함께 대궐 안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에 들어갔을 수 있었고, 몇 년 뒤 상의원에 배속되게 된다. 그때가 태종때 만들어진 도천법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비록 신분이 노비라 미천할지라도 기술과 재능이 있으면 대궐로 불러서 일할 수 있는 한시적인 제도였는데 세종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시행된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를 보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고 명나라를 큰 나라라 칭하며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양반들의 태도를 보며 나라의 자주적인 기틀을 다지고자 했던 세종대왕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지 짐작된다. 


시대적으로 잘 맞아떨어진 것인지 일찍이 기술의 중요성을 알았던 세종대왕이 있었기에 낮은 신분이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장영실도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은 만들 수 있는 환경적인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자격루, 혼천의, 측우기, 신기전, 간의, 풍기대, 수표, 앙부일구, 휴대용 앙부일구, 관천대, 일성정시의, 위부인자를 발명해낸다. 말하자면 세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셈이다. 금속활자부터 해시계, 천문기술, 신무기, 농업기구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발명품이 없을 정도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훌륭한 과학자가 계속 남아서 후대를 양성하지 못하고 석연치 않은 가마사건 이후에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병조판서였던 이암을 비롯한 친명파는 노비의 신분임에도 정5품 상의원 자리에 오른 장영실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나눈 대화가 정확히 그 당시 양반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여실이 드러내고 있다. 이를 개혁하지 못한 이유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의 폐해로 인해 명나라를 넘어선 무언가를 개발하거나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멀리하게 된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단적으로 문신을 우대하고 과학자같은 중인을 천대한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서양보다 앞선 기술력을 보였음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런 시대에 장영실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감사해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 장영실이 명나라 유학길에 환관 출신으로 세계 해양을 누빈 정화 대장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영실의 천재성을 알아본 장화는 계속 그와 교류하면서 영실이 유럽으로 건너올 수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동래현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오누이같은 사이인 미령이라는 존재도 매우 흥미로웠다. 정의공주와의 애틋한 감정은 신분제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땅을 떠나는 영실에게 정의공주는 비단보따리를 선물하는데 그 옷이 바로 한복 입은 남자에 등장하는 그 옷인 것 같다. 정화와 함께 피렌체에 온 영실은 일찍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직 교황이 지배하는 유럽은 지동설은 곧 사탄의 저주라며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으로 매도되었던 시대였다. 정화의 함대가 이탈리아 로마에 당도한 것은 세기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나기 위한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 부분이 소설에서 극적이라고 생각되는데 조선시대에서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전 유럽에 도착한 동양인의 시선은 과연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다 빈치의 스승으로 장영실은 천문과 기계설계 등 그가 가진 기술을 모두 전수한다. 다 빈치가 화가나 석조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 천재성을 보인 것도 장영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작가적인 상상력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합리적인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사적으로보면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겠지만 한국 땅에서 장영실의 기술력이 뿌리내리지 못함은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다 빈치의 손으로 만들어낸 기술 뒤에는 장영실이 10년간 전수한 가르침 덕분이었고,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가 활짝 꽃피는 출발점이 되었다. 동양과 서양의 두 천재가 하나로 만나니 이는 우리 피렌체의 복이라고 말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말처럼 일찍이 그를 알아본 사람과 후원이 있어야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537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뒤에 참고문헌이 실린 것처럼 저자가 10년간 꼼꼼하게 조사하고 자료를 모은 덕분에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소설로 재탄생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영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우린 아직 그가 언제 태어나서 죽었는지 조차 모른다. 왕실이나 양반 외에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 때문에 후대에선 이를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우수한 과학기술은 지금 보아도 경이로울 뿐이다. 이제라도 우리 땅에서 태어난 우수한 과학자와 발명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역사소설을 속도감있게 읽은 책이라 누구에게든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한복 입은 남자

저자
이상훈 지음
출판사
박하 | 2014-11-2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조선의 천재, 지중해의 별이 되다!" 역사와 상상의 경계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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