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작가인 구경선씨는 두 살때 열병을 앓은 이후 소리를 잃어버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의 목에 대고 발음을 한 자씩 해주며 알려준 덕분에 말까지는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청각장애로 인한 현실의 한계때문에 어렵게 입학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스스로 중퇴하게 된다.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이력서를 넣어보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는데 유일하게 좋아했고 잘할 수 있었던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다. 그러다 알게 된 싸이월드에서 스킨 작가를 모집한다는 공고. 하루로 쉬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한 그녀는 9개월만에 싸이월드 스킨 작가가 되었고 남부럽지 않게 바쁜 시간과 어머니에게 용돈을 줄만큼의 돈을 벌게 된다.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시간들도 싸이월드가 몰락하면서 그녀도 다시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버린다. 생각보다 그 공백이 길었는데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내가 되고 싶은 나>라는 미술 선교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각 나라의 아이들을 만나 그림을 그려주는 일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재미없게 살고 있는걸까? 왜 남들이 사는대로 살려고 했을까? 나는 왜 절망만 했던 걸까!"
미술 선교 프로그램의 네 번째 나라인 필리핀. 준비하는 도중에 야맹증처럼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잦아졌고 친구의 권유로 병원을 찾은 그녀는 망막색소변성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앞을 못보게 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절망하던 그녀는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지 모르겠다며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약속대로 떠난 필리핀에서 만난 아이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이 그려준 그림 한 장에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고 돌아온다. 앞으로 눈이 보이는 날 동안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30가지 중 25개만 채워넣었다는데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소박한 일들이다. 소리와 빛을 잃어도 따뜻한 손이 남아있다는 그녀의 말에 적어도 그녀보다 많은 것을 가진 내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는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아껴가며 살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것저것도 다 귀찮다며 우연하게 그려서 올린 <베니>라는 캐릭터는 이제 그녀를 대표하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녀가 그린 그림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따뜻한 그림체와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조건이 불리했지만 그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그래도 괜찮은 하루>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빛도 소리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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