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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Since 2013 ~)

[서평] 삼대 : 염상섭 장편소설




좋은 기회에 드디어 새움출판사에 나온 염상섭의 대표작인 <삼대>를 읽게 되었다. 교과서로 먼저 알게 된 책인데 막상 읽으려고 하니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답게 700페이지에 달하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한 문체들이 살아있는 이 삼대는 조선일보에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총 215회 연재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지닌 시대적 중요성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세대와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그 영향을 받은 세대들이 뒤엉킨 그 시절에 각 세대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대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며 갈등을 겪는가이다. 식민지라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유입하며 기존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는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려 500여년 간 성리학과 유교사상에 젖어 든 조선에서 마지막 세대로 자란 할아버지 조의관과 그의 아들은 조상훈, 손자 조덕기의 역동적인 삶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갔는지를 보면 식민지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유의미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세대갈등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것 같다. 기성세대는 늘 그렇듯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거나 적응하는데 애를 먹곤 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을 지키느냐 아니면 수용하느냐는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구수한 사투리와 방언, 지금은 쓰지 않는 대화체, 지명도 그 당시 쓰인 그대로 살리면서 수정을 최소하여 거의 완역본에 가깝다. 읽다보면 생소하기도 하고 정말 그 당시 사람들이 말을 이렇게 썼을 지 궁금했었는데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다. 우리 문학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단 책 넘김이 좋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다. 소설 속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도 재밌거니와 시대상과 심리묘사까지 탁월해서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눈 앞에 아른거리듯 펼쳐진다. 국어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맞출려고 주요 내용과 지문을 달달 외웠던 것과는 달리 편안하게 읽다보면 역시 어떤 시대든 돈이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삼대 모두 각자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먼저 조의관은 봉건주의 제도에서 평생을 살아온 인물로 대지주로 제사를 중요시하며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다. 근데 조의관은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그려진다. 아직 20대인 수원집 후처에게서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남아선호사상에다 재력과 권력이면 자신의 뜻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반면 그의 아들인 조상훈은 과도기에 놓인 사람인데 아버지인 조의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탕진하는 무기력의 화신이다. 게다가 아들과 동창생인데다 여급인 홍경애와 불륜을 저지른다. 신문물과 기독교를 일찍히 접했지만 그는 수동적이며 어긋난 삶을 살아간다. 조의관의 손자이며, 조상훈의 아들인 조덕기는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난 도련님으로 자라서 성품이 곧바르지만 몰락해가는 집안에서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만 한정되어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부조리함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한다. 친구인 병화와 어울리며 지내지만 자신의 감정이 솔직하지 못한 그는 순응형 인간으로 살아갈 뿐이다.





반면 김병화는 비록 좋은 가문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여 사회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이들 삼대보다 현실적으로 시대를 바라볼 줄 알고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인물이다. 조덕기는 친구에게 자극을 받을 법도 한데 조부의 죽음 이후로 집안은 점점 몰락해간다. 즉, 시대적으로 봤을 때는 한 지주의 몰락임과 동시에 신분제가 무의미할만큼 혼란스러운 시대이기도 하다. 재산을 둘러싼 상속욕과 부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욕망. 신분제가 무너지고 난 뒤에 남는 것은 오로지 돈이었고 돈이 권력이었다. 재력만 거머쥘 수 있다면 어제의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내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난무하던 그때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을까? 결국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으로 우리는 염상섭 작가가 삼대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려고 한 뜻을 알 수 있었다. 돈과 욕망을 둘러 싼 이들의 텅빈 마음과 공허함. 자신들의 힘으로 환경과 시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낀 무력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시절의 서울 풍경과 풍습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에 감동하면서 역시 고전은 읽을수록 그 즐거움은 깊어진다는 걸 알게 된다. 참 제대로 된 소설이며 우리 문학의 고전이다.